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들레이 E. 스티븐슨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일리노이 정치 명문가 출신인데 할아버지인 [[애들레이 E. 스티븐슨 1세]]가 [[그로버 클리블랜드]] 2기 임기 당시 [[미국 부통령]]을 지내기도 했으며 아버지 역시 그 후광을 입어 일리노이 주 국무장관 직을 지냈고, 1928년 대선에서 [[공화당(미국)|공화당]] [[허버트 후버]]와 맞붙을뻔하기도 했다. 1918년 [[제1차 세계대전]] 당시 [[미합중국 해군]]에 입대하여 [[일등병]]으로 전선 투입을 앞두고 있었으나, 직전에 전쟁이 끝나면서 참전하진 못했다.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문학과 역사를 전공한 후, [[하버드 대학교]]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졸업에 실패하고 자퇴를 선택했다. 하지만 아버지의 압박으로 결국 노스웨스트 대학에서 다시 로스쿨을 들어가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는 데 성공했다. 이후 [[프랭클린 D. 루스벨트]] 행정부에서 농업 조정국 특별 변호사, 해군 장관 법률 고문, 국무장관 특별보좌관 등을 맡으며 할아버지,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. 1948년, [[일리노이 주]]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현직 공화당 드와이트 그린 주지사를 꺾고 승리해 처음으로 선출직에 올랐는데 이 시기 자기의 [[리버럴]]적인 색채를 마음껏 뽐내며 정치적 관심을 끈다. 공공 교육 기금을 2배로 확충하고, 정치적 성향에 따라 주 경찰 채용을 좌지우지하던 정책을 금지시켰으며 주 내 고속도로를 대거 정비하면서 존재감을 키웠다. 특히 [[해리 S. 트루먼]] 행정부에서 [[냉전]]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반공단체 설립을 비판하면서 "여러분들은 진짜 간첩이 충성 서약서에 서명할까 말까 망설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? 진짜 위험한 인물들은 주의 깊고 면밀한 수사로 잡아낼 수 있지, 고작 종이쪼가리로 잡아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."라는 명연설을 남겨 주목을 받았다. 이후 두번의 대선에서 당의 공식 지명을 받아 후보로 나섰으나 패배했다.[* 이때 조지 타케이가 그의 선거사무실에서 일한 인연이 있다.] 1960년 대선에서는 당의 공식 후보 지명을 받은 [[존 F. 케네디]] 후보를 위해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유세에 나섰고 이번에는 아이젠하워 시절 부통령이었던 [[리처드 닉슨]]을 상대로 케네디가 승리하면서 간접적으로 복수를 이뤘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youtube(yGm0Jz1ZweE)]}}} || || {{{#ffc224 '''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, UN 안보리에서 발언하는 스티븐슨'''}}} || 이후 케네디의 지명을 받아 UN 주재 미국 대사가 되었으며 [[린든 B. 존슨]] 행정부 시절인 1965년까지 자리를 지킨다. [[쿠바 미사일 위기]] 당시 유엔 안보리 긴급 회의가 소집되자 소련 대사 발레리아 조린을 강력하게 압박했는데 조린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기로 한 사실을 부정하자 쿠바의 항공 사진을 공개해 국제 여론을 미국에 유리하게 크게 움직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헌했다. 하지만 1965년 7월 17일, 영국 런던에서 급작스럽게 찾아온 [[심근경색]]으로 인해 향년 65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. 후임 대사로는 아서 골드버그가 지명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